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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중봉 조헌 개혁사상의 실학적 특성〉, 《동양철학연구 41호》, 2005년, 동양철학연구회

본 논문은 조선조의 개혁사상가이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알려진 중봉(重峰) 개혁사상의 실학적 특성을 고찰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중봉은 도학사상의 태두인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을 사숙하였으며, 이이(李珥)를 스승으로 하였다. 그는 뛰어난 식견과 강렬한 애국충정(愛國衷情)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몸소 헤쳐 간 인물이었으나, 그가 생존했던 당시에는 큰 평가를 받지 못했다. 동인들부터는 '광망하고 음협'하다는 비판과 함께 선조로부터는 '간귀(奸鬼)'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심지어 스승인 율곡으로부터도 "고집이 극심하여 시세를 헤아리지 않을 뿐 아니라 치적만을 왕에게 기대하다 자기의 뜻과 같지 않으면 반드시 강경한 언사로 간할 우려가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이러한 중봉에 대한 평가는 다분히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그의 강직한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중봉은 어떠한 평가에도 개의치 않고 오직 민족의 장래와 백성들의 안위(安危)만을 생각한 민본주의에 투철한 도학자요, 개혁론자였으며, 의병장이었던 것이다. 중봉의 이러한 정신은 후세에 의리정신으로 전개되어,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청의 무력적 침략과 굴욕적 화약(和約)에 항거한 김상헌(金尙憲)을 비롯한 척화 삼학사(三學士)들의 의기(義氣), 한말에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항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한 이항로(李恒老)의 위정척사사상, 일제의 침략으로 인한 국권의 상실에 이르자 항일 의병을 일으켜 국권의 회복과 민족의 자존을 확립하고자 한 최익현(崔益鉉)과 유인석(柳麟錫)등의 의병정신 등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으며, 현실에 대한 올바른 비판과 구체적 설시(設施) 등의 경세론은 후기의 실학사상 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